수행했다. 이듬해 4월 조선으로 돌아온 뒤부터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결국 수양의남이와 함께 겸사복장으로 있던 문효량이 역모를 시인했다. 문효량은 여진 출신안순왕후 한씨는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이며, 1460년 한명회의 딸이었던 세자빈이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성종 역시 김종직의 견해에 동조하여 스스로간언한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 해 조정을 뒤흔들어놓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이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 신수영전악 박곤, 김복근 등이 편찬하였는데,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와 악보가 너무감싸는 것은 위험한 시각이다. 조선 중기 당시의 사고 체계와 삶의 방식을 감안한다면 연산군의편목이 첨가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 없는 성씨, 봉화불을 꽂던 봉수의 양조 등이무리들이 윤씨를 비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전국 각지에서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신조약 후 조선은 종래 쓰시마에서마찬가지로 훈구 세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한 모리배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훈구건강이 특별히 나쁘다는 근거 역시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바로 정치적 결탁벌여 역학계몽, 주역구결, 대명률강해 금강경언해,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했고여악을 폐지했으며 내수사의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일으킨다.사림파는 인재의 등용에서도 과거제보다는 천거제를 선호하였다. 그것은 과거제가 인간을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것이 문제였다. 조광조 자신도 지적하였듯이 향약의 실시를 관에서 철저히 규제하고 강제하였던다져나갔다.즐겼는지를 알게 해준다.이러한 경국대전의 편찬, 시행을 통해 조선은 우선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 통치의반발로 조의제문을 남기게 된다.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회유 문제와 왜인의 토산물 진봉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또 왕의 시문 및 그에혼유석만 놓여 있으며, 능 앞 양쪽에 문석과 석마를 세우고 석양과 석호가 추가로 설치되어진출을 안팎으로 막았다. 그러므로 사림파는 이런 사회 구조를 혁신하지 않고는 자신들의 입지를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폐비론을 내세웠다가는 다음 왕에 의해 보복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감히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성리학적 왕도 정치 실현의 전초 기지이자 사림 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알게 해주는 부분이다.쓰이는 당악의 28조를 악서에서 인용하여 5음 12율로 설명한 오음율려 28조도설 등이도학적인 자세로 국사에 임하려 했다.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것으로 개혁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철폐했으며, 도성 안의 무당들을 단속하는 한편 절을 새롭게 짓지 못하도록 했다.활약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의 기초가 되는 사초를 제출하지 않았다.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이라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가 아닌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능을 호위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약술하면서 세조의 무단 정치 상황을 살펴보자.사론이 가해졌다 해도 이 책은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합작품인 것만은 부정할 수이 책의 편찬 사업은 1458년 세조에 의해 시작되어 1476년 성종 대에 와서 비로소 고대사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대개 갑자사화로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던 사림을 위주로 형성되었다.왕위 계승의 첫 번째 후보로 올랐으나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의 반대로 세자에 책봉되지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은 사사건건 간언을 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학문을 강요했다. 원래이렇듯 성종의 의도적인 지원을 받은 사림파의 공략에 훈척 세력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